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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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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루이나]][[분류:루이나의 단체]][[분류:무장단체]] ||<-2><height=80><tablewidth=450><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8f3a16><tablebgcolor=#fff,#1c1d1f><colbgcolor=#8f3a16><colcolor=#fff> {{{+1 '''10월 전선'''}}}[br]Октябрьский фронт[br]October Front || ||<-2><bgcolor=#fff,#1c1d1f><height=150> [[파일:10월 전선 표장.svg|width=50%]] || ||<width=30%><height=35> '''결성''' ||1975년 11월 28일 || ||<height=35> '''해산''' ||1980년 12월 {{{-2 (자체 해산 선언)}}} || ||<height=35> '''국가''' ||[include(틀:루이나국기)][[루이나]] || ||<height=35> '''근거지''' ||벨포르, 콜마르 || ||<height=35> '''창설자'''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0; font-size: 0.75em" {{{#fff '''의장'''}}}}}} 자크 M. 티에보 {{{-2 (1975~1980)}}} || ||<height=35> '''구성''' ||청북전쟁 참전 제대군인, 반전 운동 학생 || ||<height=35> '''이념''' ||반전주의, 반군국주의, 좌익 || ||<height=35> '''표적''' ||방위산업, 군 시설, 징병 행정 || ||<height=35> '''규모''' ||대원 130명, 지원 조직 400여 명 {{{-2 (1977년 최성기)}}} || ||<height=35> '''행동 원칙''' ||예고 원칙 {{{-2 (인명 살상 배제)}}} || ||<height=35> '''분파''' ||직접행동대 {{{-2 (1977년 분리)}}} || ||<-2><^|1><height=32>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세력 추이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2px -11px"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c1d1f><tablecolor=#000,#e0e0e0><tablebordercolor=#8f3a16><bgcolor=#8f3a16><width=18%> {{{#fff '''연도'''}}} ||<bgcolor=#8f3a16> {{{#fff '''대원'''}}} ||<bgcolor=#8f3a16> {{{#fff '''공격'''}}} ||<bgcolor=#8f3a16> {{{#fff '''비고'''}}} || || 1975 || 22 || 5 || 결성 || || 1977 || 130 || 61 || 최성기·베르통 사건 || || 1978 || 95 || 44 || 군정 개시 || || 1980 || 30 || 9 || 해산 선언 || }}}}}}}}} || [목차] [clearfix] == 개요 == {{{#!wiki style="border-left: 5px solid #8f3a16; background-color: #fdf8f4,#191919; padding: 10px 14px; margin-bottom: 12px" "우리는 사람을 죽인 자들에게 항의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이것은 도덕이 아니라 논리다." {{{-2 — 1975년 11월 결성 선언 제3항}}} }}} '''10월 전선'''(Октябрьский фронт / October Front)은 1975년부터 1980년까지 활동한 루이나의 극좌 무장조직이다. [[청북전쟁]] 반대 운동에서 분화했으며, [[루이나/역사|검은 10년]]의 3대 무장조직 가운데 규모는 중간이었으나 기술적 역량은 가장 높았다. 조직의 특징은 구성에 있다. 공장과 대학에서 인원을 충원한 [[혁명적 노동자동맹]], 교도소에서 발생한 [[프롤레타리아 행동대]]와 달리 10월 전선은 참전 제대군인과 반전 운동 학생의 결합으로 결성되었다. 참전군인 출신 대원이 폭발물 취급과 군 시설의 구조·경비 체계에 대한 실무 지식을 보유했기 때문에, 조직은 소규모임에도 다른 조직이 접근하지 못한 표적을 다룰 수 있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예고 원칙이다. 조직은 폭파 대상에 사전 경고를 보내 인명 피해를 배제하는 것을 결성 선언에 명문화했다. 민간인 학살에 항의해 결성된 조직이 민간인을 죽일 수 없다는 논리였으며, 검은 10년의 무장조직 가운데 인명 살상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유일한 사례다. 이 원칙은 1977년 2월 베르통 정밀공업 콜마르 공장 폭파에서 경고가 전달되지 않아 노동자 4명이 사망하면서 무너졌고, 조직은 이 사건을 계기로 분열했다. 1977년 7월 청북전쟁이 정전으로 종결되면서 조직은 존재 근거를 잃었으나 해산하지 않았다. 이듬해 [[10.10 군사반란]]으로 군정이 성립하자 조직은 활동을 이어갔고, 군정기 내내 가장 집중적인 소탕 대상이 되었다. 1980년 헌정이 회복되자 조직은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이유로 자체 해산을 선언했다. 검은 10년의 주요 무장조직 가운데 물리적 제거나 협력자 진술이 아니라 스스로의 결정으로 해산한 유일한 조직이다. == 명칭 == 10월은 1975년 10월 청평에서 발생한 띠에우리엔 대학살을 가리킨다. 루이나군이 참가한 회색의 불꽃 작전 이후 벌어진 이 학살로 최소 18,000명이 사망했으며, 종군기자의 보도로 같은 해 11월 국내에 알려지면서 반전 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조직명은 이 달을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정해졌다. 명칭과 관련해 오랫동안 혼동이 있었다. [[루이나 국방부 특무처|특무처]] 제4과가 제방 계획의 위장 명의로 사용한 실체 없는 조직의 이름이 10월 행동단이었기 때문이다. 두 이름은 무관하며 시기도 16년 차이가 나지만, 1990년대 제방 계획의 일부가 알려지는 과정에서 양자를 연결짓는 서술이 여러 차례 나타났다. 10월 전선이 특무처와 관련되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확인되지 않았다. == 배경 == === 참전 === 루이나는 1975년 9월 할리만 사건을 명분으로 [[청북전쟁]]에 참전했다. 참전은 초기에 상당한 지지를 받았으나 전황이 장기화하고 사상자가 늘면서 여론이 악화되었다. 양성 징병제 아래 징집된 청년 다수가 실전에 투입되었고, 이는 전쟁에 대한 반대가 특정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전 사회로 확산되는 조건이 되었다. === 띠에우리엔 === 1975년 10월 회색의 불꽃 작전으로 루이나·북산 연합군이 청평의 수도를 점령한 직후 띠에우리엔에서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다. 루이나 특수부대의 과도한 폭력이 함께 기록되었으며, 종군기자의 보도로 11월 국내에 알려졌다. 정부는 보도를 부인하고 해당 기자의 종군 자격을 취소했으나 사진 자료가 이미 유통된 뒤였다. 벨포르와 콜마르에서 대학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12월까지 전국 12개 도시로 확산되었다. 참전 자체보다 학살과 그에 대한 정부의 부인이 반전 운동의 성격을 바꾸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 분화 === 반전 운동 내부에서 합법적 항의의 실효성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시위와 청원으로는 파병을 중단시킬 수 없으며 전쟁을 유지하는 물적 기반을 직접 타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소수파로 제기되었고, 이 주장을 채택한 인원이 조직 결성으로 이행했다. == 결성 == 1975년 11월 28일 벨포르에서 22명이 모여 조직의 결성을 선언했다. 참여 인원은 참전 제대군인 9명과 반전 운동 학생 13명이었다. 주도자 자크 M. 티에보는 청북전쟁에 공병 하사관으로 참전해 1975년 9월 제대한 인물이다. 폭발물 취급 실무를 담당했던 경력이 이후 조직의 활동 방식을 결정했다. 학생 측에서는 벨포르 대학 반전위원회의 소피 L. 마르샹이 참여해 선전과 대외 관계를 담당했다. 결성 선언은 다섯 항으로 짧았다. 파병 중단과 책임자 처벌을 목표로 하고, 전쟁을 유지하는 산업과 행정을 표적으로 하며, 인명 살상을 배제하고, 조직의 존속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며, 목적이 달성되면 해산한다는 내용이다. 마지막 항은 1980년 실제로 이행되었다. == 이념과 원칙 == === 이념 === 조직의 이념은 반전주의와 반군국주의를 축으로 했다. 전쟁은 방위산업과 군 관료의 이해에 따라 유지되며, 징병제는 이 구조에 인적 자원을 공급하는 장치라는 것이 기본 인식이었다. 다른 두 조직에 비해 이론적 체계는 얕았고, 자본주의 일반이나 국가 형태에 대한 규정은 문건에서 드물게 나타난다. 이 얕음은 의도된 것이기도 했다. 조직은 스스로를 혁명 조직이 아니라 한시적 저항 조직으로 규정했으며, 전쟁이 끝나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반복적으로 표명했다. === 예고 원칙 === 예고 원칙은 조직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폭파 대상에는 최소 30분 전 전화로 경고를 보내고, 인원이 상주하는 시설에는 야간에만 장치를 설치하며, 표적은 설비와 서류로 한정하고 사람을 표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세 가지 규칙으로 구성되었다. 원칙의 근거는 도덕이 아니라 일관성이었다. 민간인 학살에 항의해 결성된 조직이 민간인을 죽이면 항의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조직의 대외 선전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한 부분이기도 했다. 1976년까지 조직의 활동은 사망자를 내지 않았고, 이 사실은 반전 여론이 조직을 부분적으로 묵인하는 근거가 되었다. [[혁명적 노동자동맹]]은 이 원칙을 소부르주아적 도덕주의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두 조직 사이에 협력은 없었다. == 활동 == === 징병 행정 === 초기 활동의 중심은 징병 행정이었다. 조직은 1976년부터 1977년까지 징병사무소 14곳에 침입해 징집 대상자 명부와 신체검사 기록을 소각했다. 인명 피해가 없고 상징성이 크며 실제 행정에 지장을 준다는 점에서 예고 원칙에 가장 부합하는 활동이었다. 이 활동은 대중적 반향이 컸다. 소각된 기록의 복구에 상당한 시간이 걸려 해당 지역의 징집이 지연되었고, 조직은 소각한 명부의 사본 일부를 언론에 보내 징집 대상자의 지역별·계층별 분포를 공개했다. 이 자료는 이후 징병 형평성 논쟁의 근거로 활용되었다. === 방위산업 === 1976년부터 표적이 방위산업으로 확대되었다. 탄약·신관 생산 설비, 완성품 창고, 수송 차량이 주된 대상이었으며, 참전군인 출신 대원의 지식으로 생산 공정에서 복구가 가장 어려운 지점을 선별해 타격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조직은 방산 기업 임원을 표적으로 삼지 않았다. 사람이 아니라 생산 능력을 정지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는 이유였으며, 이 점에서 기업인을 살해한 혁명적 노동자동맹과 뚜렷이 구별된다. === 군 시설 === 군 시설에 대한 공격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경비가 엄중해 예고 원칙을 지키면서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확인된 사례는 1976년과 1977년의 보급 창고 폭파 2건, 통신 중계소 파괴 1건이다. 1976년 창고 폭파 과정에서 경비병 2명이 교전으로 사망했으며, 이는 조직이 낸 첫 사망자다. === 타 조직과의 관계 === [[프롤레타리아 행동대]]와는 1975년과 1976년 두 차례 합동 작전을 수행했다. 무기 조달과 은신처 공유 수준이었고 조직적 통합 논의는 없었다. 두 조직 모두 소규모였고 혁명적 노동자동맹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이 접촉의 배경이었다. == 베르통 사건과 분열 == 1977년 2월 19일 조직은 베르통 정밀공업 콜마르 공장의 신관 조립동을 폭파했다. 예고 전화는 규정대로 40분 전에 이루어졌으나 공장 야간 경비실로 연결되지 않았고, 조립동에서 잔업 중이던 노동자 4명이 사망했다. 조직은 사흘 뒤 성명을 발표해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시인했다. 검은 10년의 무장조직이 자신의 행위로 인한 민간인 사망을 인정한 유일한 사례다. 그러나 성명은 조직 내부의 분열을 봉합하지 못했다. 분열은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다수파는 예고 원칙이 실패한 이상 폭파 활동 자체를 중단하고 징병 행정과 선전에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수파는 정반대로, 원칙이 이미 무너졌으므로 유지할 이유가 없으며 표적을 인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7년 5월 소수파 19명이 직접행동대라는 이름으로 분리해 나갔고, 이들은 이후 방산 기업 임원 2명을 살해한 뒤 1978년 대부분 검거되었다. 티에보가 이끄는 본대는 예고 원칙을 유지했다. 다만 폭파 활동의 비중은 크게 줄었고 이후 조직 활동의 중심은 선전과 자료 공개로 이동했다. == 종전 이후 == 1977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청북전쟁이 종결되면서 조직은 결성 목적의 절반을 달성했다. 결성 선언 제5항에 따르면 해산해야 할 시점이었으나 조직은 해산하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로 제시되었다. 파병은 중단되었으나 책임자 처벌이라는 목표가 남아 있다는 것과, 띠에우리엔 사건에 대한 정부의 부인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조직 내부에서도 이 시기 활동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었고, 1977년 하반기부터 1978년 상반기까지 이탈자가 계속 발생했다. == 군정기 == 1978년 10월 [[10.10 군사반란]]으로 군정이 성립하자 조직의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군이 직접 권력을 장악한 상황은 조직이 주장해 온 군국주의 규정을 사후적으로 입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탈 추세가 멈췄다. 동시에 조직은 군정의 가장 집중적인 소탕 대상이 되었다. 군을 표적으로 삼아 온 조직이었으므로 군정 최고회의가 우선순위를 높게 두었고, 특무처의 후신 조직이 이 시기 집행한 국내 작전의 상당수가 10월 전선 관련자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조직 대원 21명이 사망했으며, 이 가운데 상당수는 재판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군정기 조직의 활동은 무장 공격보다 유인물과 지하 신문 발행에 집중되었다. 검열로 언론이 마비된 상태에서 이 활동은 조직의 이념과 무관하게 일정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으며, 1980년 [[10.24 시민혁명]] 국면에서 조직원 다수가 개인 자격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 해산 == 1980년 10월 군정이 붕괴하고 헌정 회복 절차가 개시되자 조직 내부에서 해산 논의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 12월 조직은 해산을 선언했다. 선언문은 결성 선언 제5항을 인용하며 파병이 종결되었고 군이 권력에서 물러났으므로 조직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밝혔다. 해산 이후 조직원의 처리는 일률적이지 않았다. 일부는 자수했고, 일부는 신원이 드러나지 않은 채 사회로 복귀했으며, 일부는 1981년 협력자 감형 제도를 통해 형을 감면받았다. 티에보는 1981년 자수해 징역 18년을 선고받았고 1994년 가석방되었다. 분파인 직접행동대는 조직의 해산 결정에 따르지 않았으나 이미 1978년에 사실상 소멸한 상태였다. == 평가 == === 예고 원칙의 평가 === 10월 전선에 대한 평가는 예고 원칙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갈린다. 무장조직이 인명 살상을 스스로 금지하고 5년간 대체로 지켰다는 점에서 검은 10년의 다른 조직과 질적으로 구별된다는 견해가 있는 반면, 원칙은 조직의 대외 이미지를 관리하는 장치였을 뿐이며 실제로는 사망자를 냈고 결국 분파가 이를 폐기했다는 지적도 있다. 조직 활동으로 사망한 인원은 19명이다. 이 가운데 4명이 베르통 사건, 12명이 군·경과의 교전, 3명이 직접행동대 분리 이후의 사건에서 발생했다. 다른 조직에 비해 현저히 적은 수치이나, 조직의 활동 규모가 작았다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반론이 있다. === 반전 운동에 미친 영향 === 조직이 반전 운동 전체에 미친 영향은 부정적이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무장조직의 등장으로 합법적 반전 운동 전체가 폭력과 연결되어 인식되었고, 정부는 이를 근거로 집회와 단체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다만 징병 명부 공개로 촉발된 징병 형평성 논쟁은 이후 제도 개선으로 이어진 몇 안 되는 사례로 언급된다. === 자체 해산 === 목적 달성을 이유로 스스로 해산한 것은 검은 10년의 무장조직 가운데 유일한 사례다. 이는 조직이 처음부터 한시적 저항 조직을 표방하고 존속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혁명적 노동자동맹과 프롤레타리아 행동대가 체제 전복이라는 무기한의 목표를 내걸어 스스로 종료할 수 없었던 것과 대비된다. 다만 해산이 조직의 도덕적 우위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조직의 목표가 달성된 것은 조직의 활동 때문이 아니라 정전협정과 시민혁명 때문이었으며, 조직은 자신이 기여하지 않은 결과를 근거로 해산했다는 것이다. == 관련 문서 == * [[루이나/역사]] * [[청북전쟁]] * [[혁명적 노동자동맹]] * [[프롤레타리아 행동대]] * [[10.10 군사반란]] * [[10.24 시민혁명]] * [[루이나 국방부 특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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